
	하은

[사랑을데리고오다] 승부

그 남자에 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체스 두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창백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체스판에 앉아 말을 배열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에게서는 강한 힘이 발산되었다.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위대한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비범한 인물을 대하고 있다는 거역할 수 없는 확신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그 젊은이의 매력적이면서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외모, 우아한 옷차림, 아름다운 몸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거동에 깃들여 있는 침착성과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그를 에워싸고 있는 특별한 낯선 분위기 탓일 수도 있다.

...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감탄한 나머지 사람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수가 무슨 도움이 되는지 사실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퀀은 싸움터 한쪽에서 위협하는 것도 엄호하는 것도 없이, 전혀 의미 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적들이 늘어서 있는 한가운데서 고독하고 도도하게 서 있었던 퀸은 일찍이 없었다.
장 역시 자신의 무서운 적수가 이 수로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어떤 함정으로 자신을 유혹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승부> 中에서

오랜만에 여유가 나서 책을 읽었습니다.

<승부>는 체스 게임에 관한 이야기예요.
은 책이었는데 깊이 빠져들어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면서 읽었어요.
완벽한 계산과 연륜으로 철두철미한 체스를 두는 늙은 체스 고수 장은
어느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한 신비한 청년과 체스를 둡니다.
그리고 장과 구경꾼들은 그 청년의 무모한, 그러나 경이로울만큼 새롭고 아름다운 한 수, 한 수에 빠져들고 맙니다.
거침없이 사지로 파고 드는 아름다운 퀸의 움직임에 장은 압도되고 초조해지죠.

승부의 결과가 궁금하신가요?
승부는 장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것은 이미 장도 젊은 도전자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게임을 보고 있었던 누구도 장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심지어 장조차도요.

체스판의 신비로운 젊은이를 상상하면서 저는 제가 아는 27살의 한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누군지 궁금하신가요? 그건 비밀입니다. (사실 다 아시죠?)
젊은 체스 도전자와는 달리 그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전 사실 27살의 그가 천재성을 타고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받고 홀린듯 온 열기를 목소리로 쏟아부을 때나
텅빈 무대를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상체를 드러내며 무심한 등을 보일 때
혹은 잔인할 정도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격렬한 움직임을 끝으로 무대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체스판의 아름다운 퀸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강한 매력에 빠져듭니다.
무대 위의 그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를 뛰어 넘는 것이 바로 '무대 위의 그'라는 또다른 존재 입니다.
무대 위 그만의 존재감은 압도적이고도 매혹적입니다.
가끔 무대의 빛조차 그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목이 쉬어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 감동적이고,
내게 맞춰주지 않는 먼 공허한 눈빛이 더 잡고 싶은
그에게 천재성이나 완벽함따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승패의 득실을 따지는 것조차 지극히 세속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그이니까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게도,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를 떠올릴 수밖에요.
이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닌걸요.
제게 그 구절은 그를 위해 맞춰진 글자들의 조합처럼 보였으니까요.

너무 예찬을 했나요? 콩깍지가 너무 강하다고요?
그가 무대에 제대로 몰입한 모습을 보신적이 없군요.
자만심이라고요? 네, 아름다움을 찬미할 줄 모르는 겸손함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예술의 존재에 대해서 풀어가는 멋진 이야기를 빌려
자의적 해석을 해 버렸지만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낌 감동과 그 순간 떠올린 그를 나누고 싶었어요.

이야기의 마지막에 홀린듯 그를 바라봤던 구경꾼들은
다시 작고 소소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 멋진 승부를 잊어버리지요.

전 비록 오래된 구경꾼일 뿐이지만... 그러지 못 할 것 같아요.
그는 이미 제 일상 속에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투표도 열심히 달립시다.
무대에서 빛나는 그를 위해~

비상호이

2006/11/21

어쩜...
가요계란 작은 전쟁터에서 한수한수 예술적인 수를 놓아가는 오빠와
그걸 지켜보는 구경꾼 우리...
가끔 위태한 수가 놓인데도, 지게 된다해도...
오빠의 그 아름다운 한수 한수를 잊게 되지 않는 구경꾼이 되었음 싶어요...

(2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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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곰

2006/11/21

하은님 글 한구절 한구절이 가슴에 와닿아요.. 어쩜..

(2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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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람

2006/11/21

인용해 주신 <승부>의 구절구절이 그대로 '손호영'이라는 사람을 묘사한 것 같아 정말 놀랐습니다.
특히나 무대위의 '손호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적들이 늘어서 있는 한가운데서 고독하고 도도하게 서 있었던 퀸은 일찍이 없었다."

(22: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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